1964년,
하늘에서 경비행기로 날며 대구 시가지를 촬영한 빛바랜 필름.
반세기를 훌쩍 넘겨 다시 세상 밖으로 나왔습니다.
알듯 말듯 아스라이 다가오는 1964년 대구.
그 찰나의 순간들을 찬찬히 들여다봤습니다.
▲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일대 풍경. 교구청 주변은 온통 한옥주택으로, 당시 번화가인 중앙통 일대만 벗어나면 대부분 이처럼 초가와 한옥 일색이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4년 대구 명덕네거리 상공에서 내려다 본 남산동 일대 천주교 대구 대교구청과 학교,
성당과 교회를 비롯해 멀리 달성공원이 한눈에 들어옵니다.
▲ 남산동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일대 풍경. 교구청 주변은 온통 한옥주택으로, 당시 번화가인 중앙통 일대만 벗어나면 대부분 이처럼 초가와 한옥 일색이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교구청 주변은 온통 초가집과 기와 한옥이 자리하고 있습니다.
당시 대구는 번화가인 중앙통 일대만 벗어나면 대부분 이처럼 초가와 한옥 일색이었습니다.
▲ 1964년 경 대구 명덕네거리 상공에서 천주교 대구대교구청, 서문시장, 달성공원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 초가와 기와 한옥 사이로 큰 건물은 대부분 학교와 종교시설이다. 오른쪽에 종탑이 뾰족한 건물은 계산성당, 그 왼편으로 큰 건물은 종탑을 짓기 전 서현교회 모습이다. 효성여고(현 천주교 교육원) 운동장 끝자락에서 셋방을 살았던 전태일 고향집도 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교구청 너머로 남산초등학교, 계성고등학교와 서문시장, 동산의료원이 보입니다.
서문시장 너머 달성공원에 어렴풋이 보이는 건 일제가 남긴 대구신사 건물.
일제강점기에 들어섰던 대구신사는 해방 후에도
건물은 그대로 보존돼오다 한때 단군 성전이 자리하기도 했습니다.
이후 대구신사는 1966년 8월 13일 철거되고 1970년 5월 2일 동물원이 조성됐습니다.
오른쪽에 종탑이 뾰족한 건물은 계산성당,
그 왼편으로 큰 건물은 서현교횝니다.
서현교회는 1957년 착공 후 수년째 건축 중으로, 사진속 서현교회는
종탑을 올리기 전 모습입니다.
저 무렵 청년 전태일 은 이곳 남산동에 살았습니다.
효성여고 운동장 끝자락 한옥집 단칸방에서 여섯식구가 함께 17개월 동안 셋방살이를 했습니다.
일자리를 찾아 서울로 올라간 전태일은 공장을 전전하다 열악한 노동현실에 분노하며
안타깝게도 22세 젊은 나이에 분신으로 생을 마감했습니다.
그는 1970년대를 대표하는 노동운동가였습니다.
현재 남산동 일대는 이렇게 변했습니다.
고층건물이 빼곡히 빌딩숲을 이루고 있습니다.
하지만 전태일 고향집은 개발을 비켜나 예나 지금이나 그대롭니다.
그의 열사정신을 기리고자 송필경 사단법인 전태일의 친구들 이사장은
2019년 그의 고향집을 사들여 전태일 기념관 건립에 힘을 쏟고 있습니다.
▲ 명덕국민(초등)학교와 명덕로타리 일대 풍경(왼쪽). 명덕로타리에는 시민 모금운동으로 1962년 4월 19일 2.28 민주의거 기념탑이 제막됐다. 명덕로타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보이는 큰 건물은 현재 경북여상, 경북예고, 대구교육대학교 건물이고 그 옆으로 경상중학교가 자리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대구 교구청 너머로 명덕초등학교와 명덕로타리가 보입니다.
이 무렵 명덕초등학교에는 이윤복 학생 이 다녔습니다.
당시 4학년이었던 윤복이는 노름에 빠진 아버지와 집 나간 어머니를 대신해
신문과 껌을 팔아 어렵게 동생 셋을 돌보던 소년가장이었습니다.
어려운 가정환경에서 하루하루 힘들게 생활하며 쓴 그의 일기를 각본 삼아
1965년 개봉된 영화 '저 하늘에도 슬픔이'는 전국을 눈물바다로 만들었습니다.
1964년은 모두가 가난에 배고파 했던 이윤복의 시대였습니다.
명덕로타리에는 1960년 2월 28일 대구 학생의거를 기념해
시민 모금운동으로 1962년 4월 19일 2.28 민주의거 기념탑이 제막됐습니다.
2.28학생의거는 4.19혁명의 도화선으로 자유당 독재정권을 무너뜨린 기폭제가 됐습니다.
기념탑은 이후 교통체증과 대구 지하철 1호선 공사 등에 밀려
1990년에 두류공원으로 이전됐습니다.
명덕로타리를 지나 오른쪽으로 보이는 큰 건물은
현재 경북여상, 경북예고, 대구교육대학교, 그 옆으로는 경상중학교가 자리하고 있습니다.
▲ 대명동과 앞산 안지랑골 풍경. 과수원과 논밭 가운데 자리한 건물은 1962년 개원한 대구 가르멜 여자수도원. 안지랑골에서 내려오는 물길은 복개돼 곱창골목으로 변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곳은 앞산 대명동 안지랑골 자락입니다.
논과 밭, 과수원 사이에 자리한 건물은
1962년 9월 14일 개원한 대구 가르멜 여자수도원입니다.
논밭이던 이곳은 현재 모두 주택가로 변했습니다.
수도원은 건물이 낡아 2018년 5월 19일 옛 모습을 살려 새로 건축했습니다.
수도원 옆으로 흐르던 물길은 복개돼
지금은 안지랑 곱창골목으로 핫플레이스가 됐습니다.
▲ 1964년 대봉동 상공에서 가창 방면으로 촬영한 사진. 맨 아래 건물은 편창제사(현 대봉태왕아너스), 그 너머가 경북고(현 청운맨션)다. 신천 왼쪽 상류부터 상동, 중동교, 중동, 제5관구사령부가 자리하고 있다. 길게 뻗은 도로(현 대봉로) 멀리 왼쪽은 대봉초, 대구중, 오른쪽은 미군기지(캠프헨리)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곳은 대구 대봉동 상공에서 신천 상류쪽으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맨 아래 건물은 1919년 일본인이 세운 편창제사 공장으로,
누애고치로 명주실을 뽑았는데 이 무렵에는 한국인이 운영했습니다.
편창제사와 함께 조선제사, 대구제사 등
굴지의 대구 제사공장에서 생산한 수량은 전국 생산량의 38%로
섬유도시 명성은 이때부터 시작됐습니다.
편창제사 너머 건물은 수재들의 집합소이자 대구 최고 명문고인 경북고등학교.
이 학교 출신들은 정계, 경제계, 법조계, 학계를 막론하고
전국 곳곳에서 대한민국을 이끌어가는 리더로 지금도 맹활약 중입니다.
학교는 1985년 황금동으로 이전한 뒤 청운맨션이 들어섰습니다.
신천 왼쪽으로는 상동, 중동교, 중동, 제5관구사령부가 자리했습니다.
제5관구사령부는 군수물자와 차량 정비를 담당하는 군수지원부대로, 통상 5관구로 불렸습니다.
제5관구사령부는 1982년 해체되고 현재 수성구 연호동에 자리한
제5군수지원사령부로 그 명칭이 변경됐습니다.
길게 뻗은 도로는 현재의 대봉로입니다.
대봉로 왼쪽으로 큰 건물은 현재의 대봉초, 대구중이며
오른쪽에 자리한 미군기지, 캠프헨리도 지금껏 그 자리를 지키고 있습니다.
현재 이곳은 신천 물줄기와 산자락만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을 뿐 몰라보게 변했습니다.
▲ 대구상업고(왼쪽)와 경북사대부고 건물. 대구상업고는 1923년에 설립됐고 경북사대부고는 1923년 경북도립사범학교로 개교한 뒤 대구사범학교로 교명을 바꿔오다 대학기능이 경북대로 흡수, 통합되고 1946년부터 중고등학교로 개교했다. 박정희 대통령이 바로 이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출신이다. 사진 매일아카이빙센터
대구제사공장 옆에 자리한 대구상업고와 경북사대부고입니다.
대구상업고는 1923년에 설립됐고
경북사대부고는 1923년 경북도립사범학교로 개교한 뒤 대구사범학교로 교명을 바꿔오다
대학기능이 경북대로 흡수, 통합되고 1946년부터 중고등학교로 개교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 이 바로 이 대구사범학교 심상과 출신이기도 합니다.
대구상업고는 현재 달서구로 이전돼 일반고인 상원고로 교명을 바꿔 전통을 잇고 있습니다.
이 자리엔 근대유산으로 지정된 대구상업고 본관만 남긴 채
나머지 건물은 모두 헐려 주상복합아파트가 들어섰습니다.
경북사대부고 역시 국가등록문화재로로 지정된 대구사범학교 본관과 강당 건물만 남긴 채
옛 건물은 모두 헐리고 운동장 쪽으로 새 교사를 신축했습니다.
▲ 상동 상공에서 두류산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 신천 너머 큰 건물들은 효성여대, 그 너머로 미군기지 캠프워커와 활주로, 두류산이 차례로 보인다. 신천에는 여러대의 군 트럭이 세차를 하듯 강 바닥까지 들어가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곳은 수성구 상동에서 두류산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앞쪽 큰 건물은 당시 효성여자대학교.
효성여대는 1956년부터 이곳 봉덕동 캠퍼스에 자리하다
1984년 무렵부터 건물을 하양 캠퍼스로 이전해
1994년 대구가톨릭대와 통합되면서 현재는 대구가톨릭대학교로 불리고 있습니다.
미군기지 활주로 너머로 두류산이, 활주로 옆으로 초창기 영남대학교가 보입니다.
신천에는 인근 5관구사령부 군부대 트럭이
강바닥까지 들어가 있는 걸로 보아 세차를 하는 광경으로 추정됩니다.
논밭이 즐비했던 이곳에도 아파트와 주택이 빼곡하게 들어찼습니다.
▲ 수성못 상공에서 본 파동과 신천. 신천은 백사장이 꽤 넓게 보이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가창면 용계리에 1959년 8월 가창댐이 들어서 물을 가둔 바람에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아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곳은 수성못 상공에서 촬영한 파동입니다.
도심에서 먼 외곽지로 전형적인 농촌 모습입니다.
산 아래로 흐르는 신천의 강바닥이 꽤 넓게 보이지만
이곳에서 멀지 않은 가창면 용계리에 1959년 8월 가창댐이 들어서
물을 가둔 바람에 수량은 그리 많지 않아보입니다.
60년 세월에 파동에도 논밭과 산자락은 빈틈없이 택지로 개발돼
이곳 역시 아파트가 주인 노릇을 하고 있습니다.
▲ 중동과 수성들. 신천과 중동교 주변에 초가집이 옹기종기 모여 마을(중동)을 이루고 있다. 시가지가 확장되기 전 신천 동편은 이처럼 전형적인 농촌이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곳은 수성들과 중동을 촬영한 사진입니다.
중동교 옆 신천 가까이 마을을 이루고 그 뒤로는 모두 수성들 논밭입니다.
당시는 시가지가 확장되기 전으로 수성들은 전형적인 농촌으로,
끝없이 펼쳐진 파밭이 장관이었습니다.
이곳은 1980년대부터 택지로 개발돼 한옥보다 양옥 주택이 들어섰다가
이제는 고층아파트가 속속 들어서며 새로운 변신을 꾀하고 있습니다.
▲ 신천 옆 수성동 풍경. 맨 앞 건물은 대륜고(현 신세계타운), 멀리 남산여고(현 남산고)와 신명여중, 수성교가 차례로 보인다. 1942년부터 이곳에 자리했던 대륜고는 1988년 12월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곳은 신천 옆 대륜고 부근에서 수성교 방향으로 촬영한 사진입니다.
멀리 신천 오른쪽에 현재 남산고의 전신인 남산여고와 신명여중 건물이 보이고
그 너머 다리는 수성교입니다.
▲ 대륜고와 초가집 풍경. 1921년 개교한 대륜고는 1942년 5월 남산동에서 이곳 수성동으로 이전해 온 뒤 1988년 12월 다시 수성구 만촌동으로 이전했다. 저항시인 이상화는 이 학교 교사였으며, 독립운동가 이육사는 이 학교 출신이었다.
대륜고는 1921년 애국지사 홍주일, 김영서, 정운기 등 3명이 인재양성을 통한
국권회복을 목적으로 설립한 사립학교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저항시인 이상화 는 이 학교 교사였으며,
독립운동가 이육사 는 이 학교 출신이었습니다.
대륜고는 1942년 5월 남산동에서 이곳 수성동으로 이전해 온 뒤
1988년 12월 다시 수성구 만촌동으로 교사를 옮겨갔습니다.
1987년 12월 대봉교가 완공되고
대륜고 부지에는 1989년 12월 신세계타운이 들어섰습니다.
최근에는 이 일대에도 고층 아파트가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 신천동에서 대구 시가지를 촬영한 사진. 왼쪽 다리는 1964년 건설된 동신교, 오른쪽으로는 경부선이 지나는 푸른다리, 대구선이 지나는 신성교, 1962년 10월 8일 확장 준공한 제1신천교(현 칠성교)가 차례로 보인다. 경부선 철길 옆 저수지는 훗날 메워져 1970년 9월 1일 동신초등학교가 들어섰다.
이곳은 신천동에서 대구 중심가를 향해 촬영한 사진입니다.
왼쪽에 보이는 다리는 1964년 건설된 동신교,
오른쪽으로는 경부선이 지나는 푸른다리, 대구선이 지나는 신성교,
1962년 10월 8일 확장 준공한 제1신천교가 차례로 보입니다.
현제 칠성교로 불리는 제1신천교는 대구 도심과 동촌을 오가는 관문교였습니다.
왼쪽 아래 건물은 현재의 신천초등학교,
오른쪽 경부선 철길 옆 저수지는 메워져 1970년 9월 1일 동신초등학교가 들어섰습니다.
한국전쟁 이후 피란민들이 많이 모여 살았던 신천동 일대에도
개발 붐을 타고 아파트 단지가 속속 들어서고 있습니다.
▲ 아래는 2023년 12월 수성못 상공에서 본 대구. 아파트, 고층 빌딩이 성냥갑 마냥 빼곡하게 들어섰다. 대구 인구는 1949년 31만명에서 1969년 말 100만명을 돌파했고 2000년 252만명을 정점으로 2024년 1월 현재 235만명이 살고 있다.
60년 세월이 흐른 지금은 초고층 시대.
사방을 둘러봐도 온통 아파트뿐입니다.
초고층빌딩이 성냥갑 마냥 빼곡하게 들어섰습니다.
그렇게 컸던 학교, 성당, 교회는 빌딩숲에 파묻혀 찾을 수가 없습니다.
이제는 다이어트가 큰 걱정거리가 됐습니다.
전태일, 이윤복 이 지금 태어났더라면 얼마나 좋았을까요?
이제는 영영 돌아갈 수 없는 시간.
빛바랜 사진속에 멈춘 그 시절 그 모습만이
마음의 고향으로 남아 아스라한 추억을 떠올리게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