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74년 11월 15일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어모면 농협창고(현 어모로 799)에서 열린 추곡수매에서 농민들이 도롯가에 벼 가마니를 쌓고 있다. 수매에는 식량증산을 위해 1972년부터 보급된 통일벼가 90% 이상 차지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4년 11월 15일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어모면 추곡수매장.
가로수도 잎을 떨군 늦가을, 농민들은 농협창고(현 어모로 799) 앞 길가에 아침부터 수북이 벼 가마니를 쌓았습니다.
태풍을 용케도 견뎌 여문 벼를 낫으로 거둬 탈곡하고, 가을 햇살에 바짝 말려 이제야 한몫 보는 추곡수매.
가마니 저울질은 문제 없을까? 등급은 잘 나올까?
농민들은 기대 반 걱정 반 속이 탑니다.

▲ 1974년 11월 15일 경북 금릉군(현 김천시) 어모면 추곡 수매장에서 한 농민이 수매용 벼 가마니를 정리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올해도 수매량의 90% 이상은 통일벼.
월초부터 시작된 김천시와 금릉군(현 김천시 통합) 벼 수매에서 1등품은 고작 0.6%,
그나마 괜찮다는 2등품은 겨우 32.1%, 헛농사라는 3등품은 무려 64.2%.
“통일벼는 적어도 2등품은 받아야 남는데….”
등급을 후하게 쳐 주라는 정부 방침에도 검사원의 방망이는 짜기만 해 수매장마다 입씨름이 잦았습니다.
그럴 만했습니다.

▲ 1973년 9월 경북의 한 농민이 고개 숙인 통일벼 이삭을 만져보며 흡족한 표정을 짓고 있다. 통일벼는 서울대 농대 허문회 박사가 키작은 다수확 인디카 품종과 북방계 자포니카 품종을 교배시켜 개발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쌀 4천만 석이면 주곡 자급률 100%.
해방 후 줄곧 쌀이 모자라 이웃나라에서 사다 먹었는데
1977년 11월엔 사상 처음으로 인도네시아에 10만 톤을 수출까지 했습니다.
‘녹색혁명’의 일등 공신은 단연 ‘통일벼’.
그러나 숨은 주인공은 따로 있었습니다.

▲ 1976년 10월 11일 경북 한 들판에서 농민들이 탈곡기로 벼를 탈곡해 가마니에 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사실 통일벼는 ‘다수확’ 빼고는 문제가 더 많았습니다.
맛은 말 그대로 ‘밥맛’.
일반미(아키바레)에 비할 바 못 돼 ‘보리밥 맛이 통일쌀보다 낫다’고 할 정도였습니다.
또 볏짚은 너무 짧아 농한기 가마니 짜기 부업도 못 하게 됐습니다.

▲ 1982년 11월 2일 경북 상주 사벌면 추곡 수매에서 농민들이 헐값에 수매된 통일벼 수매 대금을 세고 있다. 통일벼는 밥맛이 떨어지는데다 병해중에도 약해 농민들로부터 점차 인기가 시들해 지면서 1992년 역사속으로 사라졌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2024년 10a(300평)당 벼농사 총수입은 115만3천원.
이것저것 빼고 나면 순수익은 겨우 27만1천원(통계청 자료).
돈만 좇자면 이제 벼농사는 해서는 안 될 일.
그렇다고 벼논을 놀릴 수는 더더욱 없는 일.
예나 지금이나 농민들의 이런 속내를 누가 알아줄까요?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