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 1917년 일제강점기에 촬영된 대구 칠성바위. 위치는 현재 대구콘서트 하우스 자리로, 초기에는 7개의 바위가 북두칠성 모양으로 배치된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달성(토성)에 올라가니 갑자기 북두칠성이 움직여 하늘을 빙빙 돌다 북문 밖에 떨어졌다. 괴이한 일이다…."
이조(李朝) 중엽, 이태영(李泰永·1744~1803)은 이상한 꿈을 꾼 뒤 아들을 여럿 얻었습니다.
이는 필시 북두칠성의 정기라 믿은 그는 북두칠성에 따라 아들 이름을 지었습니다.
羲甲(희갑)·羲斗(희두)·羲平(희평)·羲升(희승)·羲準(희준)·羲肇(희조)·羲章(희장).
7형제는 자라서 모두 높은 벼슬에 올랐습니다.

▲ 1973년 1월 31일 오전 대구 중구 태평로 2가 1-1번지 시민회관 신축부지에서 칠성바위 유적 발굴이 시작돼 경북대박물관, 문화재관리국 직원들로 구성된 조사반이 발굴에 앞서 지신제를 올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태영도 대구판관(종5품)에서 경상감사(종2품)로.
가문이 번성하자 옛 꿈이 떠올랐습니다.
별이 떨어진 곳을 찾고는 깜짝 놀랐습니다.
과연 북두칠성처럼 바위가 일곱 개.
가문의 경사가 모두 이 바위 덕이라 여긴 그는 바위마다 아들 이름을 새기고
사당까지 지어 봄, 가을로 제사를 지냈습니다.
그 후로 바위는 칠성암으로 불렸습니다.
자식 없는 부인네들 발길이 잇따랐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