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시리즈 모음 바로가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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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1월 18일 오후 석유 시추(책임자 정우진) 기공식이 열린 영일 유전 제3지구 포항시 해도동 409번지에서 관계자들이 상공부로부터 무상으로 빌린 자동 회전식 시추기를 가동하고 있다.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5년 5월 30일 오후 8시 영일 유전 제3지구 포항시 해도동 석유 시추장.
"터졌다~~!"
일순간 현장은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시추기(케이싱 파이프)가 지하 350m에 이른 24일부터 가스가 서서히 분출하더니
이날 밤 지하 408m에 이르자 맹렬히 치솟았습니다.

분출 압력이 손을 댈 수 없을 정도 여서 80cm 거리에서도 불이 확 붙었습니다.
1월 18일 시추 기공식 후 5개월 만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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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1월 18일 오후 석유 시추 기공식을 갖고 시추 작업에 들어간 영일 유전 제3지구 포항시 해도동 409번지 시추장. 민간 석유 탐사원 정우진 씨가 1964년 3월 첫 시추 후 세 번째 시추를 벌인 곳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급보를 받은 김인 경북지사는 이튿날 현장으로, 상공부는 미 고문관 1명, 지질연구소 기술자 3명을 급파했습니다.
조사 결과 매탄 90%, 애탄 10%가 섞인 천연가스.

"이 가스는 석유가 고인 오일 풀(oil pool)을 덮고 있는 지층에 도달했다는 확증."
유전 책임자 정우진 씨는 " 이 가스 만으로도 공업화가 충분하다" 며 성공을 확신했습니다.

이제 가스층 아래에 진짜 오일 풀이 있는 지가 초미의 관심사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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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5월 31일 포항시 해도동 석유 시추장에 설치된 시추공에서 가스가 솟아 오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그러나 시추장은 금새 싸늘해졌습니다.
분 당 19리터(ℓ)까지 솟던 가스가 하루 만에 6리터(ℓ)로 뚝 떨어졌습니다.

"공업화는 다 틀렸다."

그렇다고 멈출 순 없는 일.
여름 내내 파 들어갔습니다.

그러던 9월 17일, 지하 1천30m 지점에서 그만 화성암반에 부딪혔습니다.
상공부는 즉시 시추 중지령을 내렸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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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5년 5월 31일 포항시 해도동 석유 시추공에서 분출되는 가스에 불이 붙어 타오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산유국의 꿈은 민족 숙원.

맨 처음 영일 유전 개발은 정부가 아닌 민간 석유 탐사원 정우진 씨가 1959년 고향 칠포리에서 고래 화석을 발견하면서 시작됐습니다.
고래 화석은 이 일대가 바다였다는 증거.

유전에 결정적 요소인 유공충(有孔蟲) 화석까지 나오자 정 씨는 유전 개발에 전 재산을 걸었습니다.
지질학자 귀동량에 일본 서적까지 뒤져 석유가 나올 만한 후보지 세 곳을 골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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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3월 12일 민간 석유 탐사원 정우진 씨가 처음으로 시추식을 가진 영일군 의창면 초곡동(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 석유 시추장. 목재 시추 타워는 시추식 후 2주에 걸쳐 세운 것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마침내 1964년 3월 12일,
영일 유전 제2지구 영일군 의창면 초곡동(현 포항시 흥해읍 초곡리)에서 첫 시추 기공식을 갖고 그해 5월 시굴에 나섰습니다.

 그러나 한 달도 못 가 실패.
시추기가 지하 암반에 끼여 두 달 동안 옴짝달싹도 못했습니다.

인근 두 번째 후보지(마산동)에서도 또 실패.
당시 장비는 외국에서 30년 전 퇴출된 충격식 시추기로, 암반을 뚫기엔 어림도 없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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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4년 6월 시추기가 지하 암반에 걸려 시추가 중단된 영일군 의창면 초곡동(현 포항시 북구 흥해읍 초곡리) 석유 시추장. 입구에 출입 금지 경고문이 붙어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5년 '포항 해도동' 시추에서 가스층이 발견되자 이번엔 정부가 나섰습니다.

1967년 4월, 정부 초청으로 포항에 온 자유중국 석유공사 기술진이
11월까지 영일만 일대 3곳을 뚫었지만 모두 화성암 돌출로 실패.

당초 2년 동안 7~8곳을 시추키로 한 이들은
"화성암 지대엔 개발 가치가 없다"
 며 이듬해 3월 짐을 싸 떠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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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9년 당시 석유 시추를 벌였던 연일유전광지질조사 약도.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제1차 석유파동(1973년)에 휘청이던 1976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은 전국을 뒤흔들었습니다.

"포항 상도동 지하 1천5백m 지점에서 석유가 몇 드럼 나 왔다." "질은 상당히 좋다."

 이제 우리도 산유국이란 소식에 온통 흥분의 도가니였습니다.
그러나 그 감격도 잠시 뿐.

몇 드럼 나왔다던 석유는 원유가 아닌 인위적 정제를 거친 경유로 판명났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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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1월 15일 박정희 대통령이 석유가 나왔다고 발표한 포항시 상대동 영일만 석유 시추 현장. 시추 타워 2곳 중 오른쪽(흰 천을 두른 시추 타원)에서 소량의 석유가 나왔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포항의 실패'를 만회할 제2의 석유 시추가 1979년 경북 의성에서 극비리에 추진됐습니다.
의성 일대는 당시 경북대 지질학과 장기홍 교수가 유력 석유 산지로 지목한 곳.
탐사 업체는 대구의 흥구석유(대표 서주원).

흥구석유는 방계회사인 중용광업을 통해 경북 일대에 석유 광업권을 따낸 뒤
그해 10월 의성군 다인면 가원2동에 첫 시추탑을 세웠습니다.

하지만 이듬해 8월까지 철야 작업에도 석유는 끝내 솟지 않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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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6년 1월 15일 시민들이 포항에서 석유가 나왔다는 박정희 대통령의 연두 기자회견을 TV를 통해 지켜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다시 시작하는 2025년 새해.
이번에는 '대왕고래' 프로젝트.

초유의 탄핵정국 속에 지난 달 20일 포항 앞바다에서 첫 시추가 시작됐습니다.

 해 뜨는 동해에 정말 '대왕고래'가 살고 있는지,
응어리 진 속이라도 후련하게 풀렸으면 좋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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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79년 10월 12일 대구 흥구석유(대표 서주원)가 방계회사인 중용광업을 통해 석유 시추를 시작하며 의성군 다인면 가원2동에 세운 높이 13m의 시추 타워.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산유국의 꿈,
1960~70년대 유전 개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