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싸웠노라. 이겼노라. 돌아왔노라." 1971년 12월 9일 오전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장병들이 파월 6년 만에 미 해군 수송선 편으로 부산항에 도착, 개선하고 있다. 청룡부대는 베트남 전에서 적 사살 9천6백41명. 생포 7백20명. 귀순 7백58명을 비롯해 대민봉사 등 자유의 십자군으로 활약했다. 사진은 권정호 전 매일신문 사진부장이 촬영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 1971년 12월 9일 오전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장병들이 베트남 파병 6년 만에 미 해군 수송선을 타고 부산항으로 개선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71년 12월 9일 부산항 제3부두. 이윽고 미군 수송선에서 청룡부대 장병들이 쏟아졌습니다.
비둘기·오색 풍선이 하늘을 수놓고, 다섯 대의 경비행기에서 뿌린 꽃가루가 부두를 뒤덮었습니다. 부산 데레사여고생들의 합창 '개선 행진곡'은 청룡의 심금을 울렸습니다.
▲ 1971년 12월 9일 오전 부산항 제3부두에서 김종필 국무총리, 3부 요인 , 장병 가족과 학생, 시민들이 참석한 가운데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개선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남(자본주의)과 북(공산주의)이 싸운 베트남 판 남북전쟁, 월남전(越南戰·1955∼1975).
1964년 통킹만 사건을 빌미로 전쟁에 뛰어든 미군은 고전을 면치 못했습니다. 존슨 미 대통령, 응웬칸 남베트남 총리가 잇따라 우방국에 원군을 요청했습니다.
박정희 대통령은 파병을 결정했습니다. 무엇보다 우리의 생존을 위한 결단이었습니다.
▲ "싸웠노라. 이겼노라. 돌아왔노라." 1971년 12월 9일 오전 부산항 제3부두에서 열린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개선 환영식에서 부산 데레사여고생 합창으로 개선 행진곡이 울려퍼지는 가운데 비둘기와 오색 풍선이 하늘을 수놓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4년 9월 의무중대, 태권도 교관단 파병. 이듬해 3월엔 백구부대(해군수송단)와 비둘기부대(건설지원단)가 출병. 9월엔 포항에서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가 군장을 꾸렸습니다. 이어 맹호(수도사단)·십자성(군수사령부)·백마(제9사단)·은마(공군지원단)부대가 1967년까지 잇따라 전장으로 향했습니다.
일 최대 상주 병력 5만명. 미군 다음으로 많은 파병이었습니다.
▲ 1965년 9월 20일 오전 포항 해병 제1상륙사단 연병장에서 열린 파월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결단식에서 박정희 대통령이 사열하고 있다. 청룡부대는 사상 첫 해외 파병 전투부대로 10월 3일 부산항을 출항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 1965년 9월 20일 오전 포항 해병 제1상륙사단 연병장에서 열린 파월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결단식. 결단식에는 박정희 대통령, 3부 요인, 국방장관, 합동참모본부장, 3군 참모총장, 브라운 미 대사 등이 참석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한국군과 교전은 피하라." 얼마나 독했던지 월맹(북베트남) 수장 호찌민은 혀를 내둘렀습니다. 1966년 6월, 호찌민도 도리 없이 김일성에 도움을 청했습니다.
그해 10월부터 북한이 파병한 규모는 조종사 96명 등 384명의 공군 전투부대와 소규모 비전투부대(베트남 측 기록). 다 합쳐도 1천명 안팍.
얼굴도 못들 형편이었지만 김일성은 다 계획이 있었습니다.
▲ 1965년 9월 20일 오전 포항 해병 제1상륙사단 연병장에서 열린 파월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결단식. 바다를 누비는 해병답게 부대명은 박 대통령이 청룡부대로 명명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8년 1월 21일, 북한 공작원 31명이 30kg 군장에 시속 10km로 산을 타 청와대 코앞까지 들이쳤습니다. 허가 찔린 1·21 사태.
"박정희 모가지 따러 왔수다!" 생포된 김신조의 기자회견은 국민들은 경악했습니다.
그 다다음 날, 북한은 자기네 영해를 침범했다며 공해상에 있던 미 해군 정찰함 '푸에블로호'를 강제로 끌고 갔습니다. 1월 26일, 박정희는 즉각 보복을 명령했습니다.
▲ 1965년 9월 20일 결단식을 마친 파월 청룡부대(해병 제2여단) 장병들이 10월 3일 부산항에서 베트남으로 향하는 미 해군 수송선 탑승을 기다리고 있다. 군함에는 10여 명의 종군기자도 탑승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김신조 일당과 똑같은 31명으로 1968년 4월에 북파키로 했습니다. 그래서 '684북파부대', 실미도 부대가 급조됐습니다. 이어 4월 1일엔 향토를 지키자며 예비군을 창설했습니다.
이런 우리를 시험하듯 북한은 그해 10월부터 늦가을까지 울진·삼척에 무장 공비를 120명이나 풀었습니다.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 아홉 살 이승복을 공비들은 입을 찢어 죽였습니다.
▲ 1967년 가을 대구 시내 여고생들이 파월 부상장병 가족 돕기 가두 모금을 벌이고 있다. 월남전에서 한국군은 연 파병 인원 32만명 중 사망 5천99명, 부상 1만1천2백32명과 15만9천여 명의 고엽제 피해자가 발생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간첩을 가려내려 11월 21일부터 주민등록증이 발급되고, 이듬해(1969년) 1월 9일엔 고교에 교련이 도입됐습니다. 유사시 학생도 동원키 위한 조치였습니다.
북한은 그러나 꿈쩍도 않았습니다.
그해 3월 주문진에 무장공비 침투, 4월 미 정찰기 격추, 6월 흑산도에 간첩선 침투, 12월엔 강릉발 서울행 칼(KAL)기도 납치해 갔습니다. (매일신문 1965년 9월 20일~1973년 2월 3일자)
▲ 1966년 8월 6일 1천7백88명의 파월 청룡,맹호 교체부대 1진이 미 해군 수송선으로 부산항에 도착하자 환영식이 열리고 있다. 이들은 월남에서 9개월 간 9개 작전을 펴 1천1백5명의 베트콩을 사살하고 귀순병 76명을 인도하는 성과를 올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파병을 막겠다고 이렇게 들쑤셨지만 김일성의 계략은 보기 좋게 빗나갔습니다.
1964년부터 1973년 철군까지 베트남 파병 연 인원은 무려 32만명. 그 대가로 중화학 공장을 지어 수출하고, 경부고속도로를 닦고, 군장비도 현대화했습니다.
북한에 밀리던 군사·경제력이 보란 듯이 앞지른 시기도 이 무렵. 그때 박정희는 김일성보다 몇 수 위였습니다.
▲ 1973년 1월 30일 월남 휴전협정으로 파월 8년 만에 국군 철수가 시작돼 국군 선발대가 미 공군 수송기 편으로 수원공항에 귀환, 강원채 주월 부사령관( 전 대구시장)이 귀국보고를 하고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2022년 2월 24일, 푸틴이 우크라이나를 침공했습니다. 금방 끝낸다던 전쟁이 3년째 수렁에 빠졌습니다.
이번엔 김정은이 결단했습니다. '러시아의 요청'은 명분.
파병 대가는? 고립무원 김정은의 속내는? 베트남 파병 60년 만에 남북이 또 수 싸움을 시작했습니다.
▲ 1973년 2월 3일 파월 국군 철수 계획에 따라 맹호부대 장병들이 대구 공군기지로 개선한 가운데 환영 나온 대구여고생이 정득만 사단장에게 꽃다발을 목에 걸어주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 1973년 2월 3일 파월 국군 철수 계획에 따라 대구 공군기지로 개선한 맹호부대 장병들이 군 트럭을 타고 동대구역으로 이동하자 아양교 부근에서 시민들이 태극기를 흔들며 환영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