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태형의 찰나의 순간, 역사적 기록' 시리즈 모음 바로가기

이미지1
이미지1

▲  1959년 9월 18일 제14호 태풍 '사라호'가 휩쓸고 간 경북 강구항. 불어난 오십천 강물과 때마침 들이친 해일이 겹쳐 강구항 일대가 물바다로 변하자 뒷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이 망연자실 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사진은 당시 세로로 찍어 인화한 사진 3장을 이어 붙인 것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59년 9월 17일 추석날.

새벽 바람이 수상쩍더니 차례상을 후려치는 비바람이 몰아쳤습니다.
이날 새벽, 제주를 휩쓸고 통영에 상륙한 제14호 태풍 '사라'.

오후 들어선 경북을 표적 삼아 무섭게 내달렸습니다.
대구·청도·경산, 영천·경주·포항, 안동·청송·영덕을 지나 울진까지 초토화.

도처가 눈 뜨고 볼 수 없는 '물지옥'이었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8일 태풍 사라호가 몰고 온 폭우에 대구 달서천이 역류해 원대동 일대 추수를 앞둔 논밭이 물바다로 변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날 오후 8시,대구 동촌 아양교는 이미 위험 수위.
날이 밝자 유원지 점포와 가옥 50여 동이 몽땅 떠내려갔습니다.

신천 상류 파동, 검단·서변·불로동 제방은 간데 없고,
신암·산격·북비산 저지대는 물바다로, 달서천이 역류한 원대동 일대 논밭은 황톳빛으로 잠겼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7일 오후 태풍 사라호가 몰고 온 푹우에 경북 영천 금호강이 범람해 양곡 창고가 침수됐다. 날이 개자 주민들이 물에 젖은 가마니를 햇볕에 말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영천에선 17일 오후 2시쯤 금호강 물이 영천교 남쪽 제방을 타고 넘었습니다.
놀란 주민들이 우르르 영천역까지 도망 왔지만 강물도 뒤쫓아 들이쳤습니다.

"이거 큰일이다."

영천역 조역(助役) 임경현씨는 기관차에 화물 열차 20량을 달아 주민들을 실어 날랐습니다.
왕복 세 번으로 2천 4백명이나 구했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8일 월성군(경주시) 외동면(읍)에서 동생을 업은 한 소녀가 입실천이 범람해 진흙탕 물로 뒤덮힌 입실시장 거리를 바라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8일 영천 금호면(읍)에선 익사자가 13명.

이날 정오 현재까지도 물에 잠긴 진량·안심 일대에선 경찰 보트가 고립자를 구하느라 이리저리 바쁘고,
하늘에선 헬리콥터가 뿌린 구호식량, 건빵 봉지가 쏟아졌습니다.

경산 고산(현 시지) 저지대도 침수돼 고산지서 이종능 경사는 나룻배 하나로 주민을 76명이나 살렸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8일 경북 월성군(경주시) 외동면(읍) 입실천이 범람해 주민들이 물에 잠긴 도로를 서성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미지1

▲  1959년 9월 18일 태풍 사라호에 경북 감포읍 오류2리 해안가 마을이 아수라장으로 변해 주민들이 어지럽게 널린 가재도구를 정리하고 있다.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월성(경주)에선 외동 입실천, 천북 신당천, 안강 칠평천 등 물길이 죄다 터져 성한 곳이 없었습니다.
큰물, 형산강이 범람한 강동면 일대는 3천여 가옥이 물밑으로.

강둑 옆 낙산리(현 오금1리)는 마을이 통째(가옥 57호 유실) 잠겼습니다.
태풍과 해일이 쌍으로 덮친 포항 해도동 일대에서도 침수 가옥이 6천여 호에 달했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9일 태풍 사라호 영향으로 침수됐다 물이 빠진 월성군(경주시) 낙산교(현 제2강동대교 자리)에 추석 귀향객을 싣고 가다 추락한 통일여객 버스가 다리 난간에 걸려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안동 용상동 주민들은 추석날 오후 5시쯤 반변천 물이 선어정 산등을 넘는 걸 똑똑히 보고는 하얗게 질렸습니다.
용상동 일대는 순식간에 쑥대밭, 산 너머 와룡국교도 휩쓸려 한동안 안동에선 '용자 든 이름은 짓지 말라'는 말까지 돌았습니다.

영양의 곡창지대 영양면(읍) 현1,2동 들판도 자갈밭으로, 청송은 외지로 가는 도로가 싹 끊어지고 석유·양초까지 동나 고립무원.
진보로 통하는 길을 뚫는다고 이유백 파천면장부터 어린 아이까지 지게로 꼬박 나흘간 돌을 날랐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8일 경북 포항에 태풍 사라호 영향으로 폭우와 해일이 겹쳐 침수된 해도동의 한 가옥에서 주민들이 가재도구를 꺼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미지1

▲ 1959년 9월 18일 제14호 태풍 '사라호'가 휩쓸고 간 경북 강구항. 불어난 오십천 강물과 때마침 들이친 해일이 겹쳐 강구항 일대가 물바다로 변하자 뒷산으로 피신한 주민들이 망연자실 한 모습으로 지켜보고 있다. 사진은 당시 세로로 찍어 인화한 사진 3장을 이어 붙인 것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영덕 강구항은 말 그대로 물지옥이었습니다.

청송·영일(포항)·영덕에서 50개의 내가 모여든 오십천 강물이 해일과 부닥치며 수위를 8m나 올려
강구 시가를 삼키고 20t급 발동선 6척을 10m 절벽 위 국도로 내동댕이쳤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7일 태풍 사라호에 포항시 용흥동 감실못 둑이 터져 추수를 앞둔 벼논으로 물이 쏟아지고 있다. 마을 뒤 탑산 정상에 6·25전쟁 때 전사한 학도의용군을 기리기 위해 1957년에 세운 전몰학도충혼탑이 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미지1

▲ 1959년 9월 17일 태풍 사라호가 몰고 온 폭우에 포항시 항구동 뒷산이 무너져 내리면서 산 아래 가옥이 매몰돼 주민들이 응급 복구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순식간에 거지꼴로 오들오들 떨며 차가운 밤 바다를 서성이는 5천여 강구 이재민들….
상인 신동휴 씨가 추석 대목을 본 4백만환이 든 궤짝, 1억 5만환이 든 동해수산(대표 김원규) 금고도 못 건지고 다 떠내려 갔습니다.

(매일신문 1959년 9월 19일~9월 27일자)

이미지1

▲ 1959년 9월 태풍 '사라호' 피해를 어렵게 복구하고 다시 평온을 되찾은 1961년 전후 영덕 강구항.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태풍이 빠져나간 길목, 울진에서는 초가 지붕이 물에 둥둥. 근남·기성·온정·평해까지 다 쓸고 갔습니다.
오갈 데 없는 66세대 3백여 주민들은 이듬해 4월, 정부 주선으로 휴전선 아래 불모지, 철원으로 눈물을 훔치며 집단 이주했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8일 태풍 사라호 영향으로 낙동강이 범람해 경북 예천군 지보면 마전리 추수를 앞둔 벼논이 물에 잠기자 주민들이 나와 들녘을 살펴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사망·실종 280명(전국 849명), 부상 1천277명(전국 2천533명), 이재민 40만 8천83명,
구호대상자 19만 9천201명(1959년 9월 28일 집계 경북 인명피해).

평균 초속 45m(최대 초속 85m), 한나절만에 150mm가 넘게 내린 폭우에 재산 피해는 말도 못해
복구에는 처음으로 군 병력이 동원됐습니다.

해방 후 이보다 더 무서운 태풍은 없었습니다.

이미지1

▲ 1959년 9월 17일 태풍 사라호가 몰고 온 폭우에 경북 금릉군(김천시) 대덕면 관기리 관기교 옆 제방이 유실돼 자갈밭으로 변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59년 그날, 고향 진주에서 명절 휴가 중이던 신정식 상등 해병은 교통 두절에도 가야 한다며
포항까지 5백리길을 4일 동안 걸어서 기어이 제시간에 귀대했습니다.

물지옥 속에서도 살아야 한다고 악착같이 헤쳐 나온 형님·누이, 아버지·어머니들….
모두가 '상등 해병'이었습니다.

이미지1

▲ 2021년 5월 22일 강원도 철원군 근남면 마현리 속칭 경상도 마을. 1959년 사라호 태풍 때 집을 잃은 울진 지역 66세대 주민들이 6.25 전쟁 후 수복지역 개발정책으로 이듬해 4월 7일 집단 이주 해 일군 마을로, 지금은 파프리카를 재배해 수출하는 부자마을이 됐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미지1

▲ 2021년 5월 22일 강원도 경상도 마을에서 만난 정호남 할머니가 태풍 사라호 때 고추장 단지, 도끼 한 자루만 챙겨 이주해 자식들을 키우던 그날을 회상하며 눈시울을 붉히고 있다.(왼쪽). 잡초 무성한 철원 황무지 땅을 옥토로 일군 경상도 마을의 한 할머니 손.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59년 추석날,
아! 사라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