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2년 6월 13일 대구 신천 상류 근로구호공사에 2만2천여 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공사는 영세민 구호 일환으로 실시됐으며 노임은 돈 대신 쌀을 지급했다. 가운데 보이는 낮은 산은 앞산에서 뻗어나온 용두산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이 많은 사람들이 대체 왜? 필름을 보고도 믿기지 않았습니다.
아무리 생각해도 있을 수 없는 일.
"그래도 엄연한 사실!"
낡은 필름이 계속 말을 걸어왔습니다.
필시 사연이 있을텐데
언제, 무엇 때문에 이토록 운집했는지 알 수 없으니 속이 탔습니다.
▲ 1962년 6월 13일 대구 신천 상류 근로구호공사에 2만2천여 명이 몰려 인산인해를 이루고 있다. 공사는 영세민 구호 일환으로 실시됐으며 노임은 돈 대신 쌀을 지급했다. 가운데 보이는 낮은 산은 앞산에서 뻗어나온 용두산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필름 속 단서는
대구 앞산 용두바위가 보이는 신천,
장대 높이 내 건 '남산 5구동 근로구호 공사장' 글씨,
옷 차림세는 1960년대.
이렇게 좁히고는 무작정 신문을 훓었습니다.
수년 치를 뒤지고도 제자리.
근 한 달이 지난 어느날 눈이 확 뜨였습니다.
▲ 1962년 6월 13일 대구 신천 중동교 부근에서 영세민들이 강바닥 자갈을 모아 제방을 보강하는 근로구호공사를 벌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62년 6월 13일 오전 신천 중동교 부근 근로구호 공사장.
공사 3일째인 이날은 전날 보다 수천 명이 더 늘어 2만2천78명.
강바닥이 사람들로 하얗게 들어찼습니다.
명목은 호안공사였지만 실은 실업자 구호사업.
지난해 큰 물난리로 흉년이 들자 이번 보릿고개가 너무 혹독해,
노임으로 당일 쌀을 지급한다니 저렇게 쏟아졌습니다.
▲ 1962년 9월 7일부터 10일간 대구 대봉동 5구~중동교 구간 신천에서 열린 2급 구호대상자 구호공사에서 영세민들이 줄지어 바구니에 담은 자갈을 제방 위로 옮기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작업은 강바닥에서 사리(자갈)를 날라 제방을 쌓는 일.
장비라곤 삽과 괭이, 바구니와 들것이 전부.
모두 맨몸으로 힘을 써야 해서 만삭으로 작업하던 김이남(31·대봉동 5구)씨는
그만 강바닥에서 불쑥 아기를 분만했습니다.
안타까운 사정에 당국은 쌀 한 가마니로 산모를 긴급 구호했습니다.
엄마 따라 왔다가 손을 놓친 미아도 16명이나 돼,
아이를 찾아가라는 순회 방송이 종일 귓전을 울렸습니다.
▲ 1962년 9월 7일부터 10일간 대구 대봉동 5구~중동교 구간 신천에서 열린 2급 구호대상자 구호공사에서 영세민들이 제방 위 도로에 자갈을 깔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3일간 연 취역자는 무려 3만5천여 명.
노임곡이 바닥나 공사가 중단됐습니다.
사흘 뒤, 이번엔 세대 당 1명씩 1천8백80명으로 다시 시작했지만
현장에는 영세민 5백여 명이 몰려와 쌀이 떨어졌다며 눈물지었습니다.
(매일신문 1962년 6월 13·14·16·17일자)
그때는 먹고 산다는 게 저토록 힘겨웠습니다.
언 62년. 벌거숭이 앞산 자락, 초가삼간, 판자집도 다 옛말.
산천도 신천도 참 많이 변했습니다.
그날, 쌀이 없다고 주린 배로 엄마 따라 자갈을 모으던 저 아이들은
지금은 어디서 무얼 하고 있을까요?
▲ 1962년 6월 근로구호공사 당시 신천과 용두산 바위 일대(위). 62년이 지나 같은 곳에서 본 2024년 6월 모습. 하천 양쪽에 도로와 둔치가 들어서 넓었던 강폭이 매우 좁아졌다. 김태형 기자 thk@imaeil.com
▲ 1962년 6월 근로구호공사 당시 신천과 용두산 바위 일대(왼쪽)와 같은 곳에서 본 2024년 6월 모습. 62년 세월에 초가집은 고층 아파트로 탈바꿈했다.김태형 기자 thk@imaeil.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