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4월 19일 오후 3시 경북대생 2천여 명이 4·11 마산 사건에 항의하며 김주열 군 모의 유해를 선두로 캠퍼스를 출발, 데모에 나서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9일 오후 3시.
"전우의 시체를 넘고 넘어…."
비장한 목소리로 경북대생 2천여 명이 교문을 나섰습니다.
'동포여 궐기하자 잃은 주권 찾기 위해'.
플래카드 아래로 김주열 군 모의 유해가 선두에 섰습니다.
혁명의 그날, 대구는 이렇게 시작됐습니다.
▲ 1960년 4월 19일 오후 3시 4·11 마산 사건에 항의하며 교문을 나선 경북대 학생들이 오후 4시 경 중앙통(로)에서 '경대(慶大)' 피켓을 앞세워 시민들과 함께 시위 행진을 벌이고 있다. 데모대 뒤로 대구역 건물(1970년 지하도 공사로 철거)이 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대구공고를 지나자 맞닥트린 무장 경찰.
평화행진 합의로 길을 튼 데모대는 동인로타리를 지나 대구역에서 중앙통(로)으로 기수를 틀었습니다.
"정부는 마산 사건 책임져라." "민족 체면을 망치지 말라."
양복에 넥타이 핀까지, 대열은 진중했고 함성은 의연했습니다.
▲ 1960년 4월 19일 오후 4시 경 경북대생들이 대구공고, 동인로타리를 지나 대구역 앞에서 대열을 지어 중앙통(로)으로 들어오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까까머리 꼬마부터 중년 시민까지 뒤를 따라 거리는 금세 거대한 물결을 이뤘습니다.
반월당, 남문시장을 돌아 다시 중앙통으로.
오후 4시 45분, 집결지 도청광장(경상감영공원)에 빼곡히 앉아 농성이 시작됐습니다.
'…애국가, 교가, 구호 등을 높이 부르며 오임근 도지사의 ###@$%&…(檢閱畢).'
(매일신문 1960년 4월 20일 자).
▲ 1960년 4월 19일 오후 경북대생들이 중앙통(로) 매일신문사(현 국민은행 대구지점 )앞에서 반월당 쪽으로 시위 행진을 벌이고 있다. 멀리 앞산이 보인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갑자기 신문 기사가 문드러졌습니다.
납 활자가 깍인 자국이 선명했습니다.
검열필(檢閱畢), 계엄군의 보도 검열로 지면마다 군데군데 휑하니 글자가 지워졌습니다.
입틀막에 사초(史草)가, 역사가 사라졌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