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1960년 2월 28일 열린 대구 신천변 민주당 선거유세 및 대구학생의거를 기록한 필름. 배상하, 정재소, 신현국 등 당시 매일신문 사진기자들이 촬영한 것으로 최근 매일아카이빙센터 필름 자료실에서 발굴한 기록물 중 일부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백만 학도여 피가 있거든 우리의 신성한 권리를 위하여 서슴지 말고 일어서라…."
1960년 2월 28일 오후 1시 5분,
이대우의 당찬 결의문을 신호탄으로 경북고생 8백여 명이 교문을 뛰쳐나와 도청으로 내달렸습니다.
일요등교 지시에, 끝내 봇물이 터졌습니다.
대구 8개 고교에서 일제히 들고 일어났습니다.
▲ 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 수성교 옆 신천에서 열린 3·15 정·부통령선거 민주당 장면 부통령 후보 선거유세에 앞서 이근상 민주당 경북도의원이 장내 정리 연설을 하고 있다. 맨 왼쪽은 조재천 민주당 대변인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3·15 정·부통령 선거를 꼭 한 달 앞두고 민주당 대선 후보 조병옥(65) 박사의 갑작스런 서거로
현직 대통령이자 자유당 후보 이승만(85) 당선은 따논 당상.
그런데 그의 나이는 85세, 잘못되면 정권이 부통령에 넘어갈 판이었습니다.
민주당 부통령 후보는 현직 부통령인 장면.
자유당은 이기붕 당선에 사활을 걸었습니다.
▲ 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 수성교 옆 신천에서 열린 3·15 정·부통령선거 민주당 선거유세에 청중들이 대거 몰려 연설을 듣고 있다. 당국의 갖가지 참석 방해에도 학생 등 10만 인파가 모였다. 신천 건너 큰 건물은 남산여고와 신명여중이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조병옥 박사 국민장(25일) 후 첫 지방유세 장소는 대구.
27일(토) 자유당에 이어 일요일인 28일 민주당 선거연설이 예고되자 25일 당국은 곳곳에 모종의 지시를 하달했습니다.
그것은 일요등교 외 제일모직·대한방직·내외방직 등 대기업은 전원 출근,
2군사령부 예하 전 부대는 체육대회와 노래자랑, 각급 공무원은 줄줄이 출장으로 드러났습니다.
(1960년 2월 29일자 매일신문)
▲ 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 수성교 옆 신천에서 열린 3·15 정·부통령선거 민주당 선거유세에 청중들이 몰려 연설을 듣고 있다. 당국의 갖가지 참석 방해에도 학생 등 10만 인파가 모였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속내를 빤히 알면서도 도리 없던 시절.
걸릴 게 없는 학생들은 달랐습니다.
"정의에 배반되는 불의를 부수는 것이 우리들의 기백…."
결의문 처럼 거침이 없었습니다.
배운 대로, 행동으로 정의를 외쳤습니다.
대구 학생데모는 29일 전국 뉴스를 넘어 AP통신을 타고 지구 한 바퀴를 휙 돌았습니다.
대구를 보고 전국 학생들이 용기를 냈습니다.
▲ 1960년 2월 28일 오후 경북고 학생들이 동인동 도지사 관사 앞에서 시위 후 구 국립극장(현 CGV대구한일)쪽으로 진출하다 출동한 정·사복 경찰에 쫓겨 가던 길을 되돌아 도망치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 1960년 2월 28일 오후 경북고 학생들이 동인동 도지사 관사 인근 골목에서 "오임근 지사 나와라. 일요등교가 왠말이냐 " 등의 구호를 외치며 시위를 벌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12일엔 부산 동래고, 13일엔 경북 문경고 학생 33명이 '선량한 농민들이여 협잡선거에 속지말자'는 삐라를 뿌리다 잡혀갔습니다.
선거 하루 전 14일엔 포항고, 부산 항도고·부산상고·동래고, 경기도 오산 시골 학생까지 '공명 선거', '학원에 자유'를 외쳤습니다.
(동 신문 3월11일~14일자)
▲ 1960년 2월 28일 오후 데모 진압에 나선 경찰이 일요등교 항의 시위를 벌이던 경북고 학생들을 체포해 경찰차에 태우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 1960년 2월 28일 오후 대구고 학생이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하며 도청으로 향하다 전동 부근에서 경찰에 연행되고 있다. 대구고 1,2학년 수백 명은 이날 오후 1시 40분 경 남일동 대구소방소를 거쳐 도청으로 진출하며 시위를 벌였다. 사진 = 매일아카이빙센터
2·28 대구학생의거는 자유당 정권에선 상상할 수 없던 일대 사건.
해방 후 최초 학생민주운동이었습니다.
단 하루였지만 함성은 지구촌을 울렸고, 그날의 기록은 역사의 증인이 됐습니다.
▲ 1960년 2월 28일 오후 일요등교 지시에 항의하며 시위를 벌이다 붙잡힌 여고생이 경찰서로 연행돼 경찰차에서 내리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 1960년 2월 28일 오후 사대부고 2학년 2백여 명이 '학생인권 옹호','구속학생 석방' 등을 요구하며 2학년 3반 교실에서 농성을 벌이자 교사와 학부형이 해산을 설득하고 있다. 학생들은 오후 7시 45분 쯤 농성을 푼 뒤 도지사 관사 앞에서 야간 데모을 벌였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그날 현장을 지킨 매일신문 사진기자 신현국은 1960년 6월 17일 자필로 이렇게 증언했습니다.
"…그 당시 우리 기분으론 한 사건도 빼놓지 않고 다 찍어 놓겠다는 것이고, 통쾌감이 절로 났던 것이다…."
▲ 1960년 2월 28일 밤 경찰이 야간 시위에 나선 사대부고생 검거에 나서고 있다. 사대부고 2학년 2백여 명은 교내에서 농성을 벌이다 오후 7시 45분 쯤 해산 후 거리 데모에 나섰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 1960년 3월 12일 경찰이 경북고 옆에 담벼락에 내무부 이강학 치안국장의 경고문을 붙이고 있다. 경찰은 민주당이 학생을 선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으며, 금후 불법행동은 결과적으로 이적 행위가 됨으로 단호히 입건 수사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 1960년 3월 12일 경북고 옆에 담벼락에 붙은 내무부 이강학 치안국장 의 경고문. 경찰은 민주당이 학생을 선동하고 있다는 증거를 갖고 있으며, 금후 불법행동은 결과적으로 이적 행위가 됨으로 단호히 입건 수사할 것이라는 내용을 담고 있다. 사진=매일아카이빙센터
그와 함께 배상하, 정재소 기자가 남긴 저 필름과 사진들은
지난해 5월 4·19혁명 기록물과 함께 대구의 두 번째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이 됐습니다.